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분노 놓아주기의 과정마음 무의식 심리 2020. 3. 26. 15:17
분노 놓아주기
분노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억울함에서 오는 분노가 있다. 억울하다 라는 것은 내가 잘 못한게 없는데 당했을 때 억울하다라고 말한다. 이런데서 오는 분노는 다른 것들 보다 더 질기다. 마음 속에 깊이 박혀 잘 빠지지도 않고 오래도록 마음을 괴롭힌다. 아마 해소가 되기 전까지는 없어 지지 않을 것이다.
당한 일도 억울한데, 속에 자리잡은 분노가 평생에 걸쳐 2차로 해를 가하는 것이다. 사건은 지나가지만, 이 분노는 해소가 되기전까지는 지나가지 않고 언제나 생생하게 현존한다. 사건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무서운 것이다. 이 것이 나를 억울 하게 한 그 사람이 밉고 싫어도, 그 사람과 상관없이 나를 위해서 용서해야 하는 이유이다.
오해하기 쉬운 것은, 용서를 하기 싫어서 안하는게 아니라 못한다는 것이다. 타는 듯한 마음의 괴로움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타죽을 것 같으니 그 불을 빨리 꺼내고 싶다. 너무너무 용서하고 싶다. 그런데 그게 안되는 것이다. 그 기억만 나면 마음에 불이 확 타오른다.
용서를 위해서 책도 읽고, 상담도 받아보고, 오래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감정이 내보내지지 않는다면 이 부분을 한번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.
"괜찮아. 그럴 수 밖에 없었어."
나를 먼저 용서 했는지 말이다. 억울 한 일을 당한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더 책망하지 않았나? '그 때 왜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어?' '왜 따지지 않았어?' '왜 그렇게 멍청하게 굴었어?' 이런 말들을 스스로 인식도 못하는 사이에 했을 수 있다. 가뜩이나 당한 일도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, 나 자신도 나에게 탓하고 책망한다면 마음은 갈데가 없다. 다른 사람도 나에게 뭐라고하고, 나도 나에게 뭐라고 하니. 위로를 받을 데도 없고, 펑하고 터질 듯 한 감정은 더욱더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.
나를 화나게하고, 나를 억울하게 한 그 사람과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,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들의 속성이 그런 것을, 그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? 그 사람들이 생긴대로 사는 것을 내가 멈추게 할 수는 없다. 나에게 달려있는 일이 아니다. 그저 사고처럼 그들을 만나고 그런 일들을 겪은 것이지, 스스로가 잘 못한 것은 없다. 그들과의 만남의 모든 과정에서 전지적 시점에 서서 가장 이상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다.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.
'이렇게 했어야지' 하고 자신을 책망했다면, 스스로에게 사과하고 그런 생각을 다시는 하지말라. 그건 남들이 당신의 탓으로 돌리려, 죄책감을 피하려 하는 말이지 당신이 당신에게 할 필요는 없는 말이다.
당신은 당신의 모습대로 존재하기 때문에, 그렇게 반응하고 대응 할 수 밖에 없었다. 그 모습이 고귀한 당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. 좋은 위로일지는 모르겠지만, 억압하고, 빼앗고, 착취하고, 거짓말하는 속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을 그 수준에 머물게 했다. 그런 인생에 깊은 평안과 기쁨은 없다.
살다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. 사람과 얽힌 일상은 끊임 없이 이어진다. 인구의 85%가 근근히 생존하는 수준의 의식레벨을 가지고 산다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연구 결과의 수치를 보더라도, 존경할 만한 사람보다는 그 반대의 사람들이 더 많으니, 어쩌다가 그런 사람을 만나고 그런 일들을 사고처럼 마주칠 수 있다. 그런데 매번 어떻게 완벽하게 대응 하겠는가? 당신은 아무 잘 못이 없다. 그저 그 상황에 존재 했을 뿐이다.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마음의 여정을 떠나 스스로를 돌보며 성장의 도약을 준비하는 당신은 훌륭하다. 그들은 그 수준에 머물러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하락시켰지만 당신은 이 사건을 밟고 도약 할 것이다. 모든 도약에는 도약을 위한 발판이 있다.
다윗, 요셉, 모세
이하는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요셉 모세의 이야기이다.
세상 사람들 누가 없겠냐 만은, 이 세 인물은 특별히 용서에 대한 과제가 있었던 사람들이다. 용서로 많이 고민하고, 오래 노력했지만 마음에 남은 티끌 하나 때문에 괴롭다면, 같이 묵상 해보면 좋을 세 사람의 삶을 소개한다.
다윗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울에게 평생을 괴롭힘을 당했다. 미친척까지 하면서 목숨을 부지해야할 정도의 괴롭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겪어야 했다. 아무 것도 잘 못한게 없는데 말이다. 양치기나 했으면 편하게 살았을텐데 어쩌다가 골리앗을 물치고 사울에게 발탁되어 그 사람의 질투로인해서 인생이 괴로웠다. 그런데 그런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죽이지 않고, 그 사람이 죽었을 때 통곡을 했다니, 어떤 마음인 것일까 궁금하다. 이를 부득부득 갈며 살 것 같은데, 어떻게 그러지 않았을까? 그것이 알고싶다.
"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
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"
(삼상21:12-13)요셉도 마찬가지다. 형제들에 의해서 노예가되었다. 까딱하면 개 고생하다가 죽었을 수도 있고, 처참하게 부려지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. 그런 생각을 한다면 용서가 아니라 찢어죽여도 모자랄 것 같은데, 후에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만났을 때 형제들이 자신들이 했던 일로 걱정하자 오히려 그들을 간곡히 위안했다고 한다. 그리고 그들을 데려와 잘 살게 해주었다.
"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
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"
(창세기 45:5)
"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
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
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
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
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"
(창세기 50:20-21)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쳐죽였는데,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에게 욕먹고 배척당했다. 그 일로 모세는 광야로 도망가서 살게된다.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받은 배신감 수치심으로 반 이스라엘 사상을 가진 사람이 됬을 수도 있는데, 그는 평생 고생고생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고 돌보는데 인생을 보낸다.
"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"
(창세기2:11-15)이 사람들은 그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고 괴롭힌 사람들에게 잘 못한게 없다. 이를 부득부득 갈며 복수를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고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의 드라마를 보면 통쾌하다고 느끼는걸 보면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마음인데, 어떻게 그 배신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?
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. 이 말은 성경에 등장하는 대단한 인물들이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결점많은 인간이라는 의미다. 요셉도 다윗도 모세도 나와 같은 결함 많은 인간, 상처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.
이 사람들의 행동은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. 자신의 사명을 아는 사람들은 연기 할 필요가 없다.이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했기에, 같은 성정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?
성경에서 낱낱히 그들의 심리묘사를 하지는 않는다. 그 비어진 공백에 비밀이 있다.
다윗과 요셉과 모세가 보낸 시간들. 그 공백에 그들이 고통을 딛고 선 승리의 긴 과정이 숨어있다. 마음이 회복되고 생각의 수준이 달라지는 과정이, 한번의 멋진 행위가 아닌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말이다.
기스 없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. 세상을 사는 과정에서 누구나 다 해결해야 할 자신 만의 이슈가 있다. 이 세 인물의 이야기를 묵상함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마음의 자유로 더 가까이 다가서게되는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