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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채우고도 구속하지 않는 것 _ <지성에서 영성으로> 읽으며, 생각기록
    책 리뷰 2020. 5. 24. 18:26

     

    방을 가득 채우고서도 나를 구속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빛이고 향기이고 바람과 같은 공기라는 것을 알게된 것 이지요. 그래요. 이 방안을 물건이나 내 몸뚱아리로 채울 것이 아니라 빛과 향기와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.

    <지성에서 영성으로> 이어령 P25

    고시원 April의 방. 그녀의 한 평짜리 작은 방에는 쓰레기가 가득차서 한 발 내 딛어 안으로 들어갈 틈 조차 없었다. 악취는 방문을 열기 전부터 복도로 새어나올 정도로 심각했고, 후에 쓰레기를 치워도 그 냄새는 바닥에 벽지에 가구에 침대 섬유에 찌들어 있어 빼기가 여간 힘들고 오래걸렸다.

    방 한 가득 그녀가 모은 쓰레기들은 일맥 상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, 소위 명품이라고 불리는 브랜드들의 껍데기들이었다.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이 가장 많았는데 내용물은 하나도 없고 봉투만 가득했다. 비싼 생수 브랜드의 빈 물병은 작은 침대 옆 틈에 늘어서 있었다. 압구정 현대백화점 식품점의 새 비닐 봉투가 한 묶음을 그대로 가져온 것 처럼 많았다. 쓰레기 틈 속에서 나온 명함 케이스. 명함 속 인물은 추측하건데 아마 그녀의 과거였던 듯 하였다. 영어로 쓰여진 명함이 소개하는 그 사람은 엘리트 출신의 고소득자로 보였다.

    방 안에 벽거울은 흰 a4용지 두장으로 가려져 있었고, 종이 위에 빨간 글씨로 중심에 크게 십자가를 그려넣고 십자가 위로 'LORD' 아래로 '이 것은 주님의 재산'이라는 글씨를 적어놓았었다.

    왜곡된 신앙으로 진짜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 처럼 보였다. 방 안은 외면과 왜곡 그 자체가 되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충격적인 이미지로 재현해 보여주고 있었다.

    그녀는 명품의 껍데기, 아무 것도 아닌 쓰레기를 재산이라 여기면서, 몸 뉘일 곳은 물론이고 한 발 디딜 틈도 남기지 않고 가득 모으고 쌓아두고있었다. 게다가 그 재산의 소유가 주님께 있음을 아는 성숙한? 신앙으로 거울을 가린 그녀.

    그녀의 방은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.

    그 방이 나의 방과 다를까?

    나의 신앙과 다를까?

     

    쓰레기가 모인 준의 방에서는 악취가 가득했다. 거울은 가릴 수가 있지만, 냄새는 가릴 수도 숨길 수도 없다. 굳게 닫힌 준의 방에서 악취를 숨길 수 없었듯이 말이다. 나의 방에는 무엇이 채워지고 있나? 흘러나오는 냄새로 알 수 있을 것이다. 이어령의 바람 처럼 내 방에는 명품 껍데기 같은 물건들이 아닌 향기가 영혼이 채워지길 바란다. 나도 그런 기도를 진심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.

     

     

    많은 사람들은 쌀자루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만 오히려 이 무신론자는 무거운 쌀자루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방안을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영혼으로 채우기 해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. 쓰레기가 쌓여가는 내 방을 빛과 향기를 채우기 위해서.

    <지성에서 영성으로> 이어령 P25-26

    지성에서 영성으로
    국내도서
    저자 : 이어령
    출판 : 열림원 2010.02.25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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